[책] 강신주의 감정수업 – 밑줄긋기

이것저것 밑줄긋기.

e북으로 읽어서 iReadItNow에 저장했던 것을 G메일로 보내 복사하니 편하다.  다만 e북이다보니 정확한 페이지 수를 알 수 없어 페이지수 기재는 생략.

연민이나 동정, 끌림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제일 좋네…

강신주의 감정수업 中 '사랑'편에 실렸던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의 나비들

강신주의 감정수업 中 ‘사랑’편에 실렸던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의 나비들

분노

다수의 약자를 통제하려면, 소수의 강자가 명심해야 할 철칙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약자에게 해악을 가할 때 같은 약자가 보는 앞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도 언제든지 해악을 입을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자기처럼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자각은 극심한 분노와 아울러 조직적인 저항을 낳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권위적인 조직에서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극히 꺼린다. 반대로 우리가 학생회 아니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약자들이 연대하는 조직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타자들이 어떤 해악을 입고 있는지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수도 있는 해악을 막기 위해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우리라는 의식이 없다면, 해악을 끼치는 강자에 대한 분노도 발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황

그러니까 당황의 감정은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일 거야.”라고 생각했던 나와 실제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때 발생한다. 어쩌면 당황의 감정에 빠진 사람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당황의 감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 혹은 자기의 맨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연민

사랑은 함께 있을 때는 기쁨을, 반대로 떨어져 있을 때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감정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사는 서글픈 감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연민의 감정은 씻은 듯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결과론적 이야기이지만, 결국 연민을 계속 품고 있으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계속 불행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왜 그럴까?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욕망

욕망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삶을 유지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법대에 간 것이 자신의 욕망이라면, 입학하자마자 우리에게는 “이제 시작이다, 멋지게 살아가야지.”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반면 그것이 타인의 욕망이었다면,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이제 완성했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복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멸시

그러니까 타인을 멸시하는 사람은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관계가 파탄나면, 그는 희생자 코스프레를 아낌없이 하게 될 것이다. 마치 부당한 일을 당한 선량한 사람인 것처럼.

과대평가

어떤 사람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일정 정도의 거리’이다.

거리란 이미 어떤 사람과 내가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아한다면, 그 사람과 너무 떨어져 있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자꾸 그 사람의 학벌, 연봉, 가족 관계 등이 눈에 들어와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 우리에게서 사랑이나 우정이라는 소망 가득한 관계는 조금씩 깨져 가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품에 꼭 안겨 있는 것이 낫다. 거리를 두고 보면 배가 나왔다거나 혹은 눈에 눈곱이 껴 있다거나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니까 말이다.

후회

후회에는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정신적 태도, 다시 말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결국 후회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끌림

허기짐이 없을 때에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나의 삶 자체가 지나치게 불행한 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다시 말해 끌림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어느 정도는 행복하도록 스스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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