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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 암스테르담(네델란드)

*주소 : Rijksmuseum Stadhouderskade 42 Amsterdam
*교통 : Museumplein 경유 트램(전차)을 타고 Museumplien에서 내림
*전화 : 020-67 32 121
*관람시간 : 화~토요일 오전 10시~오후 5시. 일·공휴일:오후 1시~5시
*휴관 : 월요일, 1월 1일
*웹갤러리 : http://www.rijksmuseum.nl

(공중에서 내려다 본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네델란드 미술이 찬란하게 꽃피어났던 때는 네델란드의 예술가들이 다른 무엇보다 그들의 나라와 시민들에게 눈길을 돌렸을 때다. 시기적으로 볼 때 그것은 17세기 전반과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엽이다.

(정원에서 바라 본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네덜란드에는 르네상스의 밀물이 다소 늦게 왔다. 16세기 중반 퐁텐블로를 거쳐 네덜란드에 이른 르네상스는 이른바 매너리즘으로 알려진 성기 르네상스였다. 여기저기를 거쳐오면서 그 기원이 두리 실하게 '짬뽕'된 것이긴 했지만 우아하고 긴 선과 형태, 고대 로마미술에서 취한 장식적인 요소들이 특히 도드라졌다. 이 흐름은, 투박했던 기존 네덜란드 미술을 '촌색시'에서 '도시처녀'로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이 변화에 힘입어 17세기의 네덜란드 미술은 힘차게 융기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의 네덜란드 미술이 '솔직' · '담백'을 특징으로 하는 옛 본성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얼마간의 국제화 이후 네덜란드 미술은 곧 이 지역 시민들 일상과 풍정을 곧이곧대로 그리는-소위 '어글리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지방색이 강한 현세적 리얼리즘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16세기가 종교개혁과 사회불안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이고, 특히 이 시기 구교국인 스페인의 지배에 대항해 싸우느라 이 신교권이 그 어느 곳 못잖은 사회적 갈등과 소모를 겪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시민 및 시민사회적 가치 지향성'은 당시 사회의 축적된 에너지가 예술 속에 그대로 방출된 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지역에서 구교의 퇴조는 최대 예술 패트런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신교는 기존 교회미술을 우상숭배로 보고 꺼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초상이나 장르 페인팅, 정물화 등으로 활로를 찾으며 광범위한 대중을 시장에 끌어들인 이 공화국의 예술적 저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농부가 그림을 사고 푸줏간이나 대장간에도 그림이 걸려 있는, 또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작품이 거래되고 작가가 후원자 대신 시장을 위 해 작품을 제작하는, 이 시민사회의 독특한 예술적 활력은 마침내 17세기를 '네덜란드 미술의 세기'로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역사의 밤을 지키는 '야경'

( 렘브란트, 야경, 1642, 큰그림보기)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처하는 예레미야, 렘브란트, 1630)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의 관람은 2층부터 시작해 1층, 지하 순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다. 2층의 중앙홀과 좌측 익관에 I5∼17세기 네덜란드 회화가 집중 배치돼 있는데. 이 미술관의 신주단지격인 렘브란트(1606∼69, 렘브란트미술관, 렘브란트 자화상)의 '야경'은 길다란 중앙홀의 맨 뒷방에 있다. 제일 넓은 방의 한쪽 벽에 오로지 그 그림 하나만 걸려 있어 정반대 쪽의 홀 입구에서도 그 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미술관의 최고 걸작 이 종교화도 아니고. 영웅들이나 신화 속 인물의 무용담을 그린 것도 아닌, 현실의 자경단(민병대)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못내 가슴에 와닿는다.

밤을 지키는 이들의 수고는 오로지 시민들과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외세로부터 되찾은 그들 땅의 진정한 주인이다(물론 당시 네덜란드가 시민지배의 사회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 지배 계급은 재력이 든든한 상공업적 기업가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자기의 몫을 아낌없이 내놓을 것이다. <야경>,도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인물들이 직접 자기 몫의 돈을 추렴해 렘브란트에게 제작비용으로 건넸다고 한다. 바로 그 같은 그들의 자부심이 왕후장상들의 허식보다 더 화사하게 빛난다. 물론 이 작품이다 완성됐을 때 어둠에 가려 모습이 희미해진 사람이나 다른 사람에게 얼굴 부분이 가려진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들의 혼이 빛어 내는 의기와 조화에 초점을 맞췄지 인물 표현의 산술적인 배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고 바로 그 비타협적인 장인정신이 일부 등장인물의 반발쯤 랑 역사의 뒤켠에 묻어두고 오히려 그들의 존재를 영원 속으로 편입시켜 놓았던 것이다.

(바울 모습을 한 자화상, 렘브란트, 1661)

압도적인 어둠, 그로 인해 더욱 진하게 살아나는 표현주의적 깊이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어둠으로 시선을 던지는 살아있는 눈동자들, 그리고 무기들. 렘브란트 특유의 빛과 그림자가 길항의 팽팽싸움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지금 깊은 밤은 머지 않아 여명의 시간 맞을 것이다. 이들의 수고는 마침내 그 보람을 보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기치 않은 데서 곧잘 파생하는 법. 훗날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달려들어 이 그림을 찢음으로서 자경단은 '불의의 습격'을 받았고 그것은 그들의 영원한 경계로도 불가항력의 것이었다. 현재는 깨끗이 수복이 돼 있지만, 옆 방에는 당시의 파손 부분을 수복하는 과정을 담은 사진 패널들이 '와신상담'의 징표처럼 내걸려 있다.

(유쾌한 술꾼, 프란스 할스, 1628~30)

<야경> 외의 당시 시민상을 담은 렘브란트의 그림으로는 또 <암스테르담 직물 조합의 감독위원들>과 <다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 등이 있다 '실사구시'의 시민사회가 차곡차곡 알차게 사회적 성취를 해가는 모습이 찰지게 묘사돼 있다. 이 밖에 '예루살렘의 멸망 슬퍼하는 예레미야', . '베드로의 부인', '바울 모습을 한 자화상' 등 그의 종교 주제 명작들도 이 국립미술관을 빛내고 있다.

렘브란트의 시민 묘사가 근본적으로 신교적 감화에 바탕을 둔.빈한 성직자의 축원 같은 것이라면. 하알렘의 위대한 초상화가 프란스 할스의 그것은 동료 시민에 대한 평등한 유대감 내지는 친밀감에서 그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붙임성 같은 것이다. 할스(1581/85∼1666)의 (유쾌한 술꾼)을 보자. 이 그림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인물은 제목 그대로 술꾼이다. 불그스레한 얼굴에 약간 풀린 눈동자, 왼손에 술잔을 든 모습이나 오른손의 개방된 손짓까지 지금 이 사람의 호방한 태도가 마주한 관자를 순식간에 술자리로 끌어들인다. 격식과 허례의 무거운 짐일랑 덜어버리고 유쾌하 게 한 잔 걸치자는 술꾼의 주문은 시공을 초월해 인간은 타고난 온혈동물임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유쾌한 술꾼>에서 할스의 제작 특징과 관련해 주목해 보게 되는 부분은 등장인물의 생생한 제스쳐다. 이 그림뿐 아니라 <말레 바베>(베를린 달램 미술관), <짚시 소녀>(루브르 미술관) 등 그의 다른 여러 유명 인물 초상들 역시 상당히 찰나적인 제스쳐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시민사회의 역동성이 이렇듯 활기 있는 몸짓과 표정으로 살아 오르니 왈후 귀족의 근엄한 초상을 그리는 데 바빴던 주변 국가의 초상화가들에 비해 그가 압도적으로 탁월한 성취를 보이게 된 것은 당연하다. 분명 타고난 재주 탓만은 아닌 것이다 사실 할 의 초상화에는 음울한 구석이 없다. 짙든 옅든 웃음이 있고 분위기나 그림 내용이 밝다 보니 붓길 또한 빠르고 경쾌하다. 오밀조밀 꼼꼼히 디테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일필휘지'하듯 치고 내달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술 취한 듯 건듯건듯 돌아가는 붓길도 다 자신감과 충족감에 차 있다 이 같은 '쾌도난마'의 불길은 후일 인상파 화가들에 이르러 다시 생생히 살아 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인상파의 붓길은 그 무렵 견고히 다져질 부르주아지 사회의 '세계에 대한 낙관'을 전파하는 가장 분명한 수단이 될 것이다. 물론 그 같은 부르주아지의 낙관은 할스의 (이삭 아브라함스 부부의 결혼 초상) 등에서도 분명한 전조를 띠고 있다.

(편지를 읽는 여인, 베르메르, 1662~63)

'반 미허른'의 위작 대상이 됐던 대가 베르메르(16)2∼75)의 실내화들은 당시 네덜란드 시민사회의 합리주의적 기풍이 그의 예술을 얼마나 앞선 현대적 감각으로 이끌었나를 잘 보여준다. <편지를 읽는 여인>을 보자. 왼쪽으로부터 부드럽게 들어오는 햇빛, 밝은 벽과 어두운 가구의 면분할적 대조, 화면의 평면성을 두드러지게 하며 기하학적으로 벽면을 가르는 지도 등 얼핏 사람을 빼고 보면 전체가 안정된 구성의 추상 작품을 대하는 것 같다. 그 같은 구성적 특질은 전경의 벽 사이로 체크 무의 바닥과 두 여인이 서로 얼굴을 마주한 모습이 보이는 <연애 편지>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17세기 작가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20세기 기하학적 추상의 매력이 이미 다 노출돼 버린 듯하다. 주제나 내용보다 화면 구 성과 표현의 심미적 기능을 우선시 하는 이 같은 태도는 그만큼 이 사회의 미의식이 근대화된 탓에 가능했던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편지를 읽는 여인>이나 <연애 편지>의 여인 모두 평범한 일상의 한 순간을 연출하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는 무척 실감나고 자연스럽다. 그것은 이들 인물이 무슨 신화나 영웅담, 또는 도덕적 교훈의 복선 속에 있지 않고 스냅 컷의 그것처럼 단순히 '눈에 잡힌 대상'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야경>에서 보는 정도의 간 한 플롯도 없다. 일상의 한순간 그 자체다. 돈을 각자 내는 '더치 코스트' 란 말이 일찍이 이 '상인의 나라'에서 발달한 고도의 합리주의에 대한 비꼼이라면, 베르메르에게서 나타나는 이 같은 회화적 합리주의가 19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네덜란드의 앞선 현대적 심미안을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뒤늦게 확 인했다는 하나의 우화일 따름이다. 그런 탓일까, 베르메르의 여인들은 그 시대 어느 곳의 여인들보다 지적이고 여유 있어 보인다.

음식 정물화,풍요의 미학

(기도하는 노파, 마에스, 1655)

풍속화풍으로 당시 시민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 가운데 얀 스테엔(1626∼79)의 <성 니콜라스의 축제>와 <즐거운 가족,>,, 니콜라에스 마에스(1634∼9))의 <기도하는 노파>, 알레얀드로의 <부엌> 등도 인상적인 작품들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아이들 <회초리를 선물 받은 단 한 아이만 빼고>의 법석대는 모습과 식탁에 툴러앉아 노래하는 이들의 정겨운 장면은 하숙집 주인이기도 했던 얀 스테엔의 탁월한 유머감각을 보여 준다.

그런가 하면 마에스의 ,<기도하는 노파>는 소찬 앞에서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기도를 드리는 한 노인의 경건한 신앙에 모든 시선을 모으고 있다. 천사가 날고 하늘이 열리는 등 온갖 장려한 수식으로 가득찬 기존 구교권의 종교화에 비해 이 단순한 그림은 신앙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당시 시민사회 의 종교적 진정성과 이른바 '자본주의 윤리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생생히 와닿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부엌, 알레얀드로, 1625)

알레얀드로의 <부엌>은 '물질적 풍요' 에 대한 이 시민들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널리고 매달린 먹을 것의 풍요로움만큼 주방장인 듯한 사내의 미소도 너그럽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많은 화가들은 이렇게 인물을 동원하지 않고 음식이나 꽃만을 그리는 방식으로도 그들의 풍요함을 자랑했다. 17세기 네델란드에서 미술품 거래가 활발해지고 대중화됐던 사실에 대해서는 앞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런 만큼 대중들의 취향과 기호가 작품 경향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거실과 식당에 걸어놓을 수 있는 그림을 선호했으며 그 선호사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담없는 음식과 꽃의 정물화였다. 시장을 놓고 경쟁하게 된 작가들도 특정 장르나 주제로 전문화하는 경우 생겨났는데, 시장이란 현실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타협을 요구하는것이었고 수요가 많은 장르인 정물화는 타협자들의 좋은 일감이었다.

이 같은 당시의 타협적 전문화가 네덜란드의 전반적인 조형 흐름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한 면만 본 결과이다. 수용의 측변에서 보자면, 미술 작품의 아름다움이라 해서 곧 그 자체로 절대는 아니다. 그거슨 시장의 지배 아래 있고 화폐로 교환된다 그것은 제각각의 가치와 효용을 미술비평 뿐 아니라 시장의 원리에 의해서도 결정 받는다. 사실 '2급품'이라 하더라도 그 이전 그런 미술품이 그렇게 광범위하게 대중들에게 구매됐던 적이 없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현상은 오히려 저변의 확대로 보아야 한다. 그 작품들이 일류가 아니라는 것은 화단이나 대중 모두에게 이미 공지돼 있는 사실이었다. 시장이 뒷받침된 이같은 저변의 확대가 있었기에 바로 렘브란트 등 위해나 대가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미술관 솽품 중 가장 특이하고 매혹적인 것의 하나일 '인형의 집'은 17세기 후반 유복한 지배계급이나 상인층 부인들의 볼거리 소유물로 제작된 장식미술품이다. 이 인형의 집에는 지금 현존하지 않는 당시 생활용구도 있을 뿐 아니라 하녀 등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가까지 알 수 있게 해줘 학술적 가치 또한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인형의 집, 17C)

-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이주헌, 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