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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 바젤미술관

*주소: St.Alban-Graben 16
*전화: 271-0828
*휴관: 월요일, 카니발(2월22-24일), 5월1일, 12월24-25일, 31일
*웹갤러리 : http://www.kunstmuseumbasel.ch


(바젤극장 광장에 설치된 팅겔리의 분수)

1662년에 세워진 이 미술관은 세계 최초의 공공미술관이라는 영예를 안으며 탄생했다. 현대미술과 고전미술을 전시하는 두 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어 12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미술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다른 유럽의 명망가들과 함께 홀바인.뵈클린.앙커.클레.아르프 등 스위스 출신 대가들의 걸작이 대부분 전시돼 있다.

닫힌 공간. 세상과 절연된 곳. 그 곳에 썩어져가는 육신이 외롭게 누워 있다. 마른 명태처럼, 꺾인 나무가지처럼 그렇게 버려진 육체. 시신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인간 형상이라는 점에서 가장 쓸쓸한 이미지다. 돌을 깎아 만든 인간 형상 앞에서는 경배도 드리는데, 청동으로 주물을 떠 만든 인간 형상 앞에서는 아름답다고 연신 탄성을 울리는데, 주검 앞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따뜻한 감정을 쏟아내지 않는다.얼음 같은 외면과 절벽 같은 이별만이 있을 뿐이다.

한 때 스위스 바젤에서 활동했던 화가 홀바인(1497~1543)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1521년)은 그 단절의 깊은 골을 죽은 예수를 통해 조망해 보는 작품이다. 파랗게 변색된 얼굴과 손발, 그리고 극심한 고통으로 뒤틀린 몸뚱아리. 과연 이렇게 비틀리고 짓이겨진, 썩어져가는 육체가 부활할 수 있을까? 그렇게 믿는다는 것은 눈 앞의 이 냉엄한 현실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홀바인이 진정으로 그리고자 한 것은 지금 이 그림 안에 없다. 홀바인은 무엇보다 예수의 영혼을 그리고 싶었다.

주어진 소명과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세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깊이 자각했던 한 영혼. 그것들을 위해 그 어떤 고통도,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한 영혼. 그렇게 순수한 영혼이었기에 오히려 그의 육신은 이리도 망가지고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홀바인은 그 망가진 육신을 통해 절묘한 반어법적 표현으로 예수의 영혼을 생생히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홀바인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유럽은 바야흐로 종교개혁의 열기에 휩싸여들었다. 역사가들이 당시 교황들에게 '패륜아' 니 '탕아' 니 하는 수식어를 붙인 것을 보면 당시 가톨릭 교회가 상당한 정신적 위기에 봉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루터와 맞섰던 교황 레오 10세에 대해 한 카톨릭 역사가는 "사도 시대에 살았더라면 교회당의 문지기로도 적합하지 않았을 인물" 이라고 평했다. 이렇듯 세속화되고 권력과 돈에만 혈안이 돼 있던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같은 온건한 인문주의자들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에라스무스는 교황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들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힐난했다.

홀바인이 이렇게 남루하고 비참한 그리스도를 그린 데는 바로 화려한 보물과 예술, 기름진 음식에 취해 있는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또한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에라스무스의 제자였던 것이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난 홀바인은 스위스 바젤로 이주해오면서 미코니우스라는 한 인문주의자로부터 형과 함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을 배웠다.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 초상)

작가로서의 명성이 쌓이면서는 당시 바젤에 와서 살던 에라스무스와 직접 교분을 쌓는 한편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그의 예술에서 늘 꼿꼿한 인문주의자의 격조가 느껴지는 이유이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은 그러나 에라스무스나 홀바인이 기대한 세상을 그 당대에는 만나보지 못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은 끝내 유혈충돌로 이어졌고 양측의 불관용은 16세기 중반 이후 한 세기 동안 피비린내나는 폭력과 종교전쟁을 야기했다. 에라스무스 같은 온건한 인문주의자는 양자 모두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왕이나 제후의 절대권력 아래 있지 않고 독립적이었던 스위스의 도시들에서는 특히 급진주의가 세를 얻었다. 바젤도 폭력적 상황을 겪었고 이를 피해 프라이부르크로 피신한 에라스무스는 당시 홀바인이 그린 그의 초상화에도 나타나듯 매우 지쳐 있었다. 예수는 이 시기의 유럽을 위해 아마도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지고 싶었을 것이다.

스위스프로테스탄트와 기독교 휴머니즘의 주요 근거지 가운데 하나가 된 바젤. 바젤은 종교개혁 이후 그 이상에 근거해 대체로 근면검소하고 실용주의적인 전통을 발달시켰다. 국경지대이기에 대외교역의 중심으로 화학.제약.전기공학 분야의 산업발전을 이끌었으며 지금도 스위스 관세 수입의 3분의 1을 벌어들이는 곳이다. 이 같이 프로테스탄트 시민사회의 실속 있는 성장이 만들어낸 위대한 성취의 하나가 바로 바젤미술관이다.

스위스 최고의 농촌화가로 불리는 앙커(1831-1910)는 사랑스런 농촌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그려 인기를 끌어온 작가. 그의 '건초에서 잠자는 시골 소년' 은 온통 흙먼지 투성이가 되어 손발도 씻지 않은 채 널브러져 자는 아이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관람객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바로 화가의 아들이다. 주검으로 쓰러져 있는 홀바인의 그리스도와 대비되는, 생명력과 만족감이 넘치는 이 소년의 모습은 바로 예수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고자 했던 그 평화의 현현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스위스를 연상할 때 느껴지는 그런 평화의 인상도 엿보인다.

이주헌 <갤러리'아트 스페이스 서울'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