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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 고흐 예술관

*주소:Paulus Potterstraat 7,1071 CX Amsterdam
*전화:20-570-5200
*휴관:월요일,1월1일.
*웹갤러리:http://www.vangoghmuseum.nl

‘고 더치(go Dutch)’,‘더치 페이(Dutch pay)’란 말이 있다. 음식점에서 계산할 때 일행 각자가 나눠 내는 것을 말한다.네덜란드 식으로 한다는 것,그것은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됨을 뜻한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바다를 놓고 다퉜던 17세기 네덜란드에 대한 영국인들의 부정적인 시각이 이런 표현을 낳은 측면도 있지만, 신교권으로서 일찍부터 시민사회와 자본주의를 발달시켜 합리적인 생활이 몸에 밴 네덜란드인들 특유의 습성이 이런 표현의 탄생에 일조했다.

일찌감치 싹튼 개인주의

유럽의 17세기는 절대주의와 중상(重商)주의의 시대였다.그러나 네덜란드는 이들과 거리가 있었다. 한동안 패권국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네덜란드는 절대주의의 강력한 중앙집권화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주변 강대국이 왕권을 강화하는 동안 네덜란드가 공화국 체제를 갖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중상주의는 기본적으로 국가를 강력하게 만드려는 상업체계이고 자본주의는 개인을 부유하게 만드려는 상업체계다. 근대 초기 유럽 각국에서는 두 체계가 큰 갈등 없이 공존했다. 하지만 절대왕정을 기피한 네덜란드는 중상주의 이론에서 벗어나 자유무역을 우선적으로 지향했다. 자본주의의 원칙에 더 충실했던 것이다.

절대주의 체제 하의 다른 유럽인들에게 당시 이같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태도는 개인적 이득만을 생각하는 ‘지나친 개인주의’로 비쳤을 것이다. 이런 네덜란드에서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근대적 미술시장이 최초로 형성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교회 장식을 꺼리는 신교가 자리를 잡은데다 귀족의 철저한 몰락으로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전통적인 예술 후원자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들을 대체한 계층이 바로 부를 쌓게 된 시민 일반, 오늘날과 같은 ‘익명의 소비자들’이었다.당시 한 영국인이 암스테르담의 미술시장을 돌아보고 쓴 글에서 나타난 놀라움을 들어보자.

일반 시민의 미술 후원자

“시장에는 많은 그림이 나왔는데,그 값은 대개 매우 쌌다. 구매자의 대부분은 소시민과 농부들이었고,농부들중에는 2천∼3천 파운드 짜리 그림을 소유한 이도 있었다.물론 그들은 이런 그림을 (큰 이윤을 남기고) 되팔았다.”

이 같이 자유시장에서 화가가 얻은 것은 글자 그대로 자유였다. 그전에는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발주자인 교회와 귀족들의 까다로운 간섭을 받아야 했는데 이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었다.

대신 그들이 잃은 것은? 그것은 생활의 안정이었다.과거에는 한 번 패트런(patron·후원자)과 관계를 맺으면 그 관계가 오래 지속돼 일종의 고용-피고용 형식을 띠었다.예술가의 생활이 순탄하게 보장됐던 셈이다. 하지만 불특정 소비자를 겨냥해 작품을 제작하고 시장에 내놓는 방식은 늘 빈곤의 그림자를 달고다니는 것이었다. 더구나 새롭게 자유를 얻은 예술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취향에 몰입하는 경향이 강해 갈수록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경쟁의 제물이 된 예술가들 가운데 일부는 견디다 못해 꽃장사를 하거나(반 고옌),여관을 운영하거나(얀 스텐),화상이 되는(베르메르) 등 부업을 가지기도 했다.

자유로워 고독했던 고흐

이 네덜란드 미술계 특유의 현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전 유럽, 나아가 전세계적로 퍼져 나갔다. 자본주의의 발달에 발 맞춰 그 과정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사실 하나는 바로 그 흐름에 가장 비극적으로 치인 화가 또한 네덜란드 출신이었다는 것이다.그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반 고흐는 평생 1점의 작품만을 팔았다. 그것도 그를 불쌍히 여긴 동생이 다른 사람을 시켜 산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반면 1890년 그가 그린 ‘의사 가셰의 초상’은 1천2백억원에 팔렸다. 역사상 시장이 가장 철저히 외면한 화가. 그것은 반 고흐가 당대인들의 취향이나 기호보다 자신의 관심에만 집요하게 매달렸음을 의미한다. 자유의 가치를 알게 된 예술가로서 그는 돈을 포함해 그 어떤 것에도 자신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반 고흐의 이런 추구는 예술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그가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문제점을 심각하게 느낀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흐 작품 700여점 소장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에 기반해 발달해온 서양의 자본주의. 반 고흐 당시에는 제국주의로 치달으며 계급 갈등과 인간성 파괴 등 부정적인 측면이 극심하게 드러난 때였다. 합리성이 야만으로 등식화되던 시기.그 위기의 시기에 그는 자유를 추구하는 예술가로서 그가 지켜야 할 가장 고귀한 것, 바로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애절하게 조망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 까닭에 그의 그림은 무엇을 그린 것이든 곧 그의 자화상,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그림은 대상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오던 사람들에게 인간의 내면을 그려 보여준 화가.그래서 인간 영혼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한 화가. 지친 노동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난 ‘구두’(1885년),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는 ‘해바라기’(1888년), 삶의 아득한 여정을 돌아보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년) 등 그의 모든 그림은 다 이렇듯 그의,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1973년 문을 연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는 이 걸작들 외에 그의 유화 200여점과 드로잉 550여점을 수장하고 있다.

이주헌 <갤러리'아트 스페이스 서울'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