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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 오르세 미술관

주소:1 rue Bellechasse 75007
전화:4049-4814
교통:지하철 Solf rino 선 오르세 미술관역
휴관:월요일 및 1월 1일, 5월 1일, 12월25일
웹갤러리 : http://www.musee-orsay.fr


화가는 물감 주머니를 꺼냈다. 공같이 볼록한 돼지 방광. 송곳으로 방광을 살짝 찔렀다. 물감을 짜기 위해서였다. 퍽! 주머니가 너무 팽팽했는지 방광이 찢어지고 그 틈으로 유화 물감이 쏟아져 나왔다. 옷 이곳저곳에 물감이 튀었다. 화가 난 화가는 묵직한 화구 상자를 발로 걷어차며 내뱉었다. "내 다시는 야외 스케치 나오나 봐라. " 이런 불만 속에서도 인상파 화가들은 야외풍경을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화가들은? 그들은 풍경을 주로 실내에서 그렸다. 그들이 야외의 밝은 빛에 인상파만큼 매료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의 물감 주머니에서 알 수 있듯 우선 화구 자체가 야외작업에 적절하지 못했다.

튜브물감과 인상파의 등장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은 튜브 물감을 이용해 매우 간편하게 야외 스케치를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 직전인 1850년대에 튜브 물감이 상용화된 덕분이었다. 그래서 르누아르는 말했다. "튜브 물감이 없었다면 세잔.모네.시슬리.피사로 등 인상파는 존재할 수 없었다." 튜브 물감의 경우처럼 미술 외적인 환경, 특히 경제적.기술적 환경의 변화가 미술의 전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경우 또한 적지 않다. 튜브 물감의 발명 외에 파리 교외로 철로가 부설된 것 역시 화가들이 야외 스케치를 즐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만든 요인이다.

19세기 화려한 영화 간직

또 사진기의 발명에 따라 빛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크게 높아진 것도 야외의 빛을 그리는 데 대한 관심을 크게 늘렸다. 파리가 19세기 서양 미술의 최고 아성이 된 데는 이처럼 예술의 변화를 촉진한 다양한 사회적 진보가 그 어느 유럽 도시보다 활발히 이뤄진 탓이다. 그런 까닭에 파리는 지금도 19세기의 화려했던 영화를 여전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옛 영화' 에 잠들어있던 파리를 일깨운 위인이 등장했다. 바로 고(故) 프랑수아 미테랑이다. 미테랑은 파리가 자꾸 과거의 문화 수도로만 거론되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파리는 미래 문화예술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한 미테랑은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을 포함해 파리의 면모를 일신하는 12개의 대형 건축 프로젝트(그랑 트라보)를 추진했다. 이 문화대통령의 탁월한 안목과 결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는 역사(驛舍)에서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오르세 미술관이다. 그의 기발한 발상 덕에 오늘도 미술 나라로 '기차여행' 을 떠나려는 이들이 이 미술관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다.

 

자연주의~아르누보까지 소장

(left:Claude Monet La Gare Saint-Lazare 1877 Oil on canvas)

오르세가 자랑하는 소장품이 가장 영광스러웠던 19세기의 작품들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미래예술에 대한 미테랑의 선점(先占)의지도 이렇듯 과거의 저력이 뒷받침해줄 때 힘이 나는 것이다. 지금도 세계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미술은 19세기 인상파 회화며, 그 대표작들이 오르세 미술관의 한 자락에 모여살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작품들은 1848년부터 1914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자연주의.사실주의에서 인상파.후기인상파.상징주의.아르누보까지 다양하다. 이 미술관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 한국인 관객들이 감상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좋은 방법은 우리의 현대사를 비춰보며 감상하는 것이다. 1848년 2월혁명 직후 보수의 역풍이 불면서 사회 현실에 실망한 쿠르베나 밀레 같은 화가들은 서민과 농민을 대상으로 한 자연주의 미술, 곧 나름의 객관적 현실인식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이같은 심정적 배경이 있었기에 밀레의 '이삭줍기' 는 "혁명 선동세력이 폭탄을 던지는 모습을 상징화한 것" 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들의 그림에서 1980년대 우리 민중미술의 냄새를 어느 정도 맡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는 20여년간 무역규모가 4백배나 증가하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다.그 번영은 1871년 파퀴 코뮌의 유혈 내란을 거쳐 19세기말에 '벨 에포크' 라고 하는 '좋은 시절' 로 이어진다.

풍요가 가져온 밝음의 美

바로 이 시기에 지난 역사의 모든 고통과 회한을 딛고 등장한 예술이 인상파다. 그러니까 인상파의 그 사랑스러운 밝음은 1789년 대혁명 이래 처절했던 대립의 한 세기를 봉합한 뒤에야 비로소 나올 수 있었던 색채인 것이다. 게다가 산업혁명의 결과로 당시 서유럽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굶주리는 사람이 거의 없는, '절대빈곤' 의 단계를 넘어선 사회가 됐다. 이 인류 최초의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 이 인류 역사상 가장 밝은 화면을 만들어낸 셈이다.인상파 미술에 대한 전세계적인 사랑에는 바로 이 물질적 풍요에 대한 환희와 동경, 그리고 자부심 등이 버무려져 있는 것이다. 파리는 그렇게 한 시대의 예술을 꽃피웠고 오르세는 그 파리를 고스란히 보듬어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