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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국립미술관 - 프라하(체코)

*주소 : Narodni Galleriet v Praha(Sternberg Palace)/Hradcahske Nam. 15. Praha 1
*전화 : 352441-3
*개관 : 화요일 9시 ~ 19시, 수-일요일 10시~18시
*휴관 : 월요일

슈테른베르크 궁전프라하의 몰다우(볼타바)강을 따라 걷노라면 몸과 마음이 어느 중세의 신비한 도시로 접어드는 것 같다. '보헤미아의 보석' , 황금의 프라하'라는 말이 실감나는 아기자기하면서도 환상적인 풍경이 고성과 옛 다리, 강과 숲의 기막힌 조화 속에 나그네의 발걸음을 없이 잡아끈다. 이렇게 멋들어진 '그림'에 점경으로 들어앉는 것도 마치 방랑 예술가 '보헤미안'이라도 된 듯 지극히 매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된 돌다리 카를 교(1357년 건립)에 이르면 그 고아한 아름다움과 북적대는 관광객, 노점의 온갖 신기한 기념품 등으로 중세의 축제가 재현된 느낌마저 없지 않다. 실을 이용해 낡 우는 소리를 내는 장난감이 있지 않나. 인형극판이 벌어지지 않나, 초상화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가 있지 않나, 다리 하나 건너는 데 하루 해가 다 질 판이다. 관광객들이야 하나라도 놓치기 아까워 사진을 찍어 대느라 정신이 없다

국립미술관의 본관격인 슈테른베르크 궁전은 프라하 성 밖, 그러니까 프라하 성 정문을 등 뒤로 하고 보아 우측 도로변에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간 곳에 깊숙이 숨어 있다. 궁전이라고 하니까 대단한 건물을 연상하기 쉽지만, 3층 높이의 아담한 규모도 그렇고 몽색한 입구가 궁전이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한다. 그 대신 이 일대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지로 사용됐을 만큼 고색창연하고 운치가 있는 곳이다.

비토 대성당1945년 종전과 더불어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었다)은 같은 해 국립미술관 관련 법규를 정비하고 48년 대망의 국립미술관을 개관했다. 현재 모두 8개의 국립미술관이 분관 형태로 시내에 산재해 있는데,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주로 수도원과 성을 이들 미술관을 위한 보금자리로 '차출'했다. 1만3천 점에 달하는 회화, 6천 점의 조각, 4만 점의 소묘, 30만점 가량의 판화가 슈테른베르크 궁전을 정점으로 한 이들 미술관에 분산 소장돼 있다.

프라하 미술 컬렉션의 영광은 네덜란드 미술과 독일 미술을 집적으로 모았던 루돌프 2세 시절(1576∼1612)로 거슬로 올라간다. 합스부르크 가의 궁전이 있는 빈을 떠나 프라하에서 살았던 루돌프 2세는 이 가문의 화려한 미술 컬렉션을 프라하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루돌프 2세의 서거 뒤 프라하가 더 이상 합스부르크 가의 수도로서 역할을 못하게 되자 이 컬렉션은 빈과 기타 유럽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이 무렵의 미술품은 그래서 얼마 되지 않다. 주위 강국에 의한 침략과 지배가 계속된 결과다. 그러므로 현재의 컬렉션 토대는 1796년 보혜미아의 귀족과 시민들에 의해 '미술애호가협회' 가 결성되면서부터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테른베르크 궁전 미술관의 수장품은 14∼15세기 이탈리아 회화, 15∼16세기 네덜란드 회화, 14∼18세기 독일 ·오스트리아 회화, 16∼18세기 이탈리아·프라스·스페인 회화, 17세기 플랑드르 회화, 20세기 유럽 회화, 19∼20세기 프랑스 회화 등 7개 분야로 크게 나뉜다. 이 가운데 크라나흐의 (아담과 이브), 뒤러의 (로자리오의 성모), 렘브란트의 (서재의 학자), 피터 브뤼겔의 (건초 만들기), 브론지노의 (엘레오노라 디 토델로의 초상)들은 널리 알러진 명작이다. 근·현대회화로는 루소의 (나 자신, 초상=풍경)이나 뭉크의 (강변에서의 춤), 클림트의 (처녀들), 마리 로랑생의 (소녀들이 있는 풍경), 로트렉의 (무랑 루즈) 등이 눈에 익은 작품들이다.

건초 만들기 (브뤼겔)
처녀들 (클림트)
강변에서의 춤 (뭉크)

슈테른베르크 궁전 미술관에 서 있자니 갈등하는 인간상이나 인내하는 인간상 등 삶의 풍랑 속에 있는 인간들을 묘사한 작품에 자꾸 눈길이 간다. 예술적 성취보다는 그림 뒤에 깔린 인생살이의 다양한 공감대를 확인해 보고 거기에 사색의 술 한 잔을 보태 저 유장한 중세의 강으로 흘려 보내보고 싶은 것이다.

우는 신부(얀 산데르스 반 헤메센)2층 15∼16세기 네덜란드 회화실에 있는 얀 산데르스 반 헤메센(1500∼63)의 <우는 신부>는 그와 같은 인간상 가운데서도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 너무도 못생긴 신부가 아름다움의 상징인 버찌관을 쓴 채 콧물까지 흘려가며 울고 있다. 16세기의 그림이지만 우는 신부의 표정 묘사만큼은 무척이나 생동감 넘친다. 약간은 모자라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우리는 코믹하다는 느낌까지 받게 되는데, 그러나 사실 이같은 처절한 울음은 그 사람이 경험하는 공포의 크기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어린아이의 울음을 어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그들의 울음 속에 때로 어른들의 절망 못지 않은 절망이 자리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그림의 긴장이 발샐한다. 우선 모델의 그 같은 처절함이 이 그림에는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돼 있지 않다. 모델이 정상적인 지력을 갖고 있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을 화가는 단순한 우스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냉소는 그러나 이 모델을 둘러싼 주위의 공통된 시선이었을 것이므로 오히려 당시 분위기의 전달에 있어서는 매우 정직한 접근법이 아닐 수 없다

신부 오른쪽의, 그러니까 화면 왼쪽의 신랑도 화가의 '잔인한 리얼리즘을 못 벗어나기는 마찬가지다 신부 못잖은 추한 몰골의 신랑은. 그들의 '복된 결혼식날'을 신부 달래는데 다 쓰고 있으나 여간 무기력해 보이는 게 아니다. 늘그막에야 총각 신세를 면함에도 신랑의 표정에서는 즐거움일랑 전혀 찾아보기 힘들다 하나의 통과 의례로서 '자의 반 타의 반' 혼례식을 치르는 느낌이다. 그 고된 영혼은 눌리고 치이며 살아온 밑바닥 삶의 한전형을 보여준다. 작가의 탁월한 사실주의적 묘사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루크레티아의 자결(시몽 부에)이 '소외된 자의 인생 극장 을 본 뒤 3층 16∼18세기 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 회화실로 가면 이번에는 '가진 자의 인생 극장'을 대할 수 있다. 삶의 고통에 대하여 할께 공명하는 그림이다. 그 '가진 자의 인생 극장'이 프랑스 작가 시몽 부에(1590∼1649)의 대표작 <루크레티아의 자결>이다.
'수산나의 목욕'과 유사한 주제로 부지기수로 그려져온 '루크레티아의 자결'은 이런 이야기이다 로마 초기의 전설적 역사시대때 루크레티아라는 한 귀부인이 살았다. 당시 군주 타르킨은 그의 혈족이었는데, 이 폭군의 아들 섹스투스가 어느 날 그의 방에 들어와 그를 겁탈하려 했다. 섹스투스는, 루크레티아가 저항하면 그와 노예 하나를 죽여 나란히 눕혀놓고 간음 현장에서 베어버렸다고 선전하겠다고 위협했다. 집안의 명예를 생각해 몸을 허락한 루크레티아는 섹스투스가 돌아간 후 아버지와 남편에게 각각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리고는 자결해 버린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타르킨의 조카부르투스가 분기해 결국 타르킨을 권력의 자리에서 축출해 버린다.

작가는 고급스런 침실과 양탄자, 그리고 모피 옷 등으로 주인공과 귀한 지체를 표현하고, 칼을 쥔 오른손의 단호함과 하늘을 향한 시선의 경건함으로 주인공의 고결한 정신을 표현했다. 카라밧지오 풍의 강렬한 명암대비가 이같은 작가의 의도를 더욱 강화해 주고 있는 데, 이런 그림들이 결국 기왕의 가부장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보호하기 위해 주로 제작됐던 점을 고려하면, 루크레티아도 그 오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같은 회생이 기득권 계급안에서도 여자나 기타 약자들에게 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사람살이의 매정함'은 더욱 도드라지게 눈에 들러본다.

성 히에로니무스(리베라)이 전시 구역에 있는 또 하나의 인상적인 '고난의 인물상은 스페인 작가 주세페 데 리베라(1591∼1652)의 <성 히에로니무스(제롬)>이다. 이 인물상 역시 유럽의 웬만한 미술관에서는 흔하게 대하게 되는 존재로, 스스로 고난을 택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앞의 두 인물과 구별된다. 그는 보통 굴 속에서 옷을 대충 걸친 채 성경을 번역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주위에는 꼭 해골 또는 사자가 있다. 4세기∼5세기 초에 활동했던 실제 인물인 히에로니무스는 사제로서 교황 다마시우스의 조언자와 비서 역할도 했으나 만년에 베들레헴 근처의 한 동굴에 들어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다. 불가타 번역본으로 알려진 그의 라틴어 성경은 수세기 동안 캐톨릭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활용됐는데, 그의 그같은 노고는 그를 지속적인 회개와 온갖 육체적 유혹에 저항하는 '기독교 전사'의 한 전형으로 받들게끔 만들었다.

리베라의 그림에는 그가 벗은 모습에. 해골과 사자가 모두 들어 있는 구성으로 그려져 있는데. 정교한 노인 근육의 묘사와 나풀나풀한 종이 묘사가 사실감을 더해 준다. 해골이 상징하는 그 극한적인 '내면의 투쟁'은 '원효의 깨달음'을 생각나게 한다. 어떤 종교든 종교는 역시 극한 상황과 인생무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 삶의 벼랑에서 히에로니무스나 원효 같은 극소수의 인간은 신생아가 탯줄로부터 분리되듯 모든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분리된다. 그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렇게 그들을 그림으로 그려 기리거나 그 그림을 바라봄으로써 그들의 해탈로부터 위안을 얻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부적인 셈이다.

손을 모은 노인(요르단스)의사와 환자 (스테엔)히에로니무스와 같은 성인은 아니지만 한 남루한 노인의 기도 징면을 그린 네덜란드 작가 요르단스(1593∼1678)의 (손을 모은 노인 습작) 역시 보면 볼수록 잔잔한 감흥을 전해 주는 작품이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물감과 붓놀림의 자취를 이용해 두텁고 거칠게 표현한 이 그림에서 연륜이라는 것이 주는. 언어를 초월한 인생의 교훈을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평화의 색' 녹색을 주조색으로 함으로써 비록 비천한 신세지만 명경지수처럼 맑은 노인의 마음속이 들여다 보이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속절없는 세상사'로 고민하는 인간상을 그런 얀 스테엔(1626∼79)의 <의사와 환자>도 나름의 교훈을 주는 그림이다. 넉넉한 가정의 안주인이 기진맥진한 상태로 병을 호소하고 있는데, 기실 이 여인의 병은 외간 남자에 대한 연정으로 생긴 상사병이다 뒤의 하녀가 멋쩍은 웃음을 웃고 있는 것은, 자신은 그 병의 원인을 잘 안다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오로지 앞뒤가 꽉 막힌 의사 선생님만 진지하게 처방전을 쓰고 있는데, 그의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는 헛다리를 짚고 있는 셈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덩달이 시리즈' 같은, 17세기 네덜란드 시민사회의 사회 풍자 시리즈의 하나인 것이다.

한편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귀중하게 평가되는 이 미술관의 그림들 중에는 알프레히트 뒤러(1471 ∼15281의 <로자리오의 축제>와 마부제(1478∼I533/36)의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누가>가 특히 눈길을 끈다. 로자리오의 축제는 3층 14 ∼ 18세기 독일 오스트리아 회화 전시실에 걸려 있다 베니스 거주 독일 상인들의 요청에 따라 그려진 이 그림은. 흔히 르네상스의 이상이 충만한 최초의 북유럽 그림으로서 뒤러 자신의 예술세계뿐 아니라 당시 북유럽 회화의 전개 과정에 일대 전환점이 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베니스에서 체제하는 동안 뒤러는 그곳 길드의 화가들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았는데, 이 텃세는 국제적 명성을 얻기 원하는 '주변국 출신'의 작가로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인 작가가 뉴욕 화단에서 부딪치는 그런 어려움인 셈이었는데, 그때는 작가들이 장인 조합을 이뤄 집단적 이해를 추구했으므로 핍박이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뒤러의 입장에서는 (로자리오의 축제)가 바로 그 장애물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끔 이끌어 준 결정적인 디딤돌이었다. "내가 훌릉한 판각가이기는 하나 붓으로 그린 그림은 영 형편 없다고 말하던 작가들을 모조리 입 다물게 해 주었네"라고 뒤러는 <로자리오의 축제>를 보낸 직후 독일의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확실히 그의 자부심만큼이나 <로자리로의 축제>는 매우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마부제의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성 누가) 역시 성모자를 소재로 했다는 점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로자리오의 축제)와 닮은 점이 있다. 르네상스의 수용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그림인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적 고딕 회화의 느낌이 더 압도적임으로 말미암아 투시 원근법의 효과는 상당히 장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뒤러보다는 더 전통지향적이다. 그럼에도 이 그림에도 역시 화가의 자의식은 진하게 드러나 있어 뒤러의 그림과 닮은 꼴을 이룬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그 자의식은 뒤러의 그것처럼 개인적이고 근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 그림에서 작가가 갖는 자의식은, 누가가 최초로 성모상을 그린 사람으로 여겨져 온 속설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성모상을 그린 이가 성경의 저자이자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다 - 그것은 아직 사회적 신분이 낮은 당시의 북유럽 화가들에게는 상당한 위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화가들의 수호자'를 그린 이 그림이 미술가 길드의 의뢰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점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화가들을 위한 부적인 셈이다.

이주헌 -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中 (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