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정노동(Emotional Labor)

감정노동(Emotional Labor) – 노동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가 (앨리 러셀 혹실드, 이매진, 2009)

감정노동(Emotional Labor) – 노동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가 (앨리 러셀 혹실드, 이매진, 2009)

20P, 승무원의 경우에는 서비스를 제공할 때의 감정 상태도 서비스의 한 부분이다.

170P, 감정노동과 재정의 된 자아
먹고 살기 위해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하지 않은 세 가지 어려운 질문에 직면해야만 한다. 이 질문에 하는 대답은 그 사람이 자신의 ‘자아’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결정할 것이다.

첫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내 직업상의 배역과 회사에 녹아들지 않으면서도 정말 잘 맞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특히 (정체성이 형태를 덜 갖추었기 때문에) 어리고 경험이 적은 노동자들과 (여성들을 향해 남성에게 자신을 맞추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그 반대 경우보다 많기 때문에) 여성에게서 두드러진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위험은 일반적으로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 더 크다.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려면, 이 노동자는 자신의 자아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상황과 자신의 배역이 자신이 일하는 회사와 맺고 있는 관계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상황을 구별하기 위한 일의 기준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상황을 ‘객관화’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한 승객이 프렌드쉽 고속 비행 상품의 결점에 관해 불평하면, 아직 그런 불평을 탈개인화할 줄 모르는 승무원은 그것을 자신의 사적인 부족함에 관한 비판으로 받아들인다. 그런가 하면 이런 승무원은 비행으로 기분이 좋아진 승객이 하는 칭찬을 자신의 특별한 자질이 반영된 결과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그런 칭찬을, 조합이 강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승객 대 승무원의 비율이 개선됐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 승무원은 ‘진짜’ 자아에 쉽게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사건을 해석한다. 자신의 자아가 크기 때문에 많은 사건이 그 자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모든 회사가 그렇지만 특히 가부장적이고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에서는 정책적으로 개인의 만족감을 회사의 번영과 정체성에 관한 인식과 뒤섞으려고 한다. 이런 노력은 대개 얼마간 잘 작동한다. 회사에서 ‘자연스러운 친절함’을 강조하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노동자들은 사적 차원의 자아와 공적 차원의 자아, ‘편안한 나’와 ‘신경이 곤두선 나’를 구별하기도 힘들고, 자신의 직업을 연기로 해야 하는 일로 정의하기도 어렵다. 어느 선까지는 이 두 자아가 충분히 떨어져 있지도 않다. 이런 노동자들은 마음먹는 대로 어떤 우연한 사건을 개인화하거나 탈 개인화할 수 있게 해주는 내면 행위 기술의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적응력이 없으면 일이 잘못되었을 때(그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이 노동자들은 종종 상처받고, 화를 내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후략)

P. 173. 그렇지만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한 노동자들은 종종 두 번째 문제가 더욱 날카롭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내면 행위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질문은 ‘어떻게 하면 내가 행동하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과 분리된 상태에서 내 능력을 쓸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중략)

P.174. 여기서 세번 째 질문이 등장한다. “내가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내면 행위를 하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냉소적으로 되지 않으면서도 내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은 직업을 재정의함으로써 허위와 자존감에 관련한 문제를 풀 수 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거짓되었다고 비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것을 환상을 만들어낼 것을 단호하게 요구하는 직업상 필요하고 바람직한 표면 행위로 보았다.

P176. 감정이 성공적으로 상업화된 상황에서는 노동자가 거짓이라는 느낌이나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노동자는 자신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실제로 얼마나 인간적인지에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내면 행위는 소외의 원천이 아니라 그런 만족을 얻도록 도와주는 요소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과정으로서 감정의 상업화가 무너져 독립된 요소들로 나누어지면, 표현은 공허해지고 감정노동은 철회된다. 실패한 변형을 감추는 것이 과제가 되는 것이다. 자랑스럽기 때문이든 화가 났기 때문이든, 표정과 감정은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P246. 크리스토퍼 래쉬는 최근에 우리 문화에서 불건전한 거짓 자아에 관한 가장 최신의 모델은 자아도취형 나르시시스트 Nrcissist 일지 모른다고 서술했다. 나르시시스트는 탐욕스럽게 인간관계를 먹이로 삼으면서, 사랑과 존경 두 가지가 모두 영원히 부족한 홉스(T.Hobbes)시의 만인에 맞선 만인의 투쟁 상태의 세계 속에서 사랑과 존경을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한다. 결과를 무시하기 때문에 이 나르시시스트의 노력은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이 받게 되는 존경은 진짜 자아가 아닌 거짓 자아에게 바쳐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문화는 다른 형태의 거짓 자아를 생산해냈다.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지나치게 신경 쓰는 이타주의자 Altruist이다. 우리 문화에서 여성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돌보는 업무를 전통적으로 부여받았기 때문에 거짓 자아를 지나치게 발달시키고 그 경계를 놓칠 위험이 더 큰 위기에 놓여 있다. 자아도취적 거짓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이 남성에게 더 큰 위험이라면, 이타주의적 거짓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은 여성에게 더 큰 위험이 된다. 나르시시스트가 감정의 사회적 용법을 자신이 이익을 얻는 쪽으로 돌리는 데 능숙하다면, 이타주의자는 상대적으로 이용당하기 쉽다. 이것은 그 사람의 자의식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정한 자아’가 집단과 그 집단의 복지에 더욱 안정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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