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심리학 오디세이’ 中 – 왜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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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영 지음 | 예담 | 2009년 09월 15일 출간

 

31. 왜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을까? – 감춰진 지식, 잠재 학습 현상

학습심리학에서는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보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즉, 보상이 없으면 배움도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실험실에서 끊임없이 증명되어 왔다. 쥐들은 먹이가 나오지 않으면 결코 지렛대를 누르는 법도, 미로를 찾아나가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특별히 보상을 주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도 온갖 것을 배운다. 특별히 관심도 없고 다시 만나리라 기대하지도 않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음식의 이름이 갑자기 기억나기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스쳐지나간 뉴스 기사가 어느 순간 떠오르기도 한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는 행동들 중에도 아무런 이유도 없고 특별한 보상도 얻지 못했음에도 배운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상 없이 배우는 것들이 많음에도 어째서 행동주의자들의 실험실에서는 보상이 있어야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잠재 학습 Latent Learning 현상에 있다.

경험을 통해 진정으로 배우는 것들

잠재 학습이란 학습의 일정으로 그 학습의 결과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형태의 학습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뭔가를 배우긴 배웠는데 그 배움의 효과가 당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상태이다. 학습된 내용이 잠재된 이유는 보상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서 보상이 주어지면 학습한 결과가 즉시 나타나게 된다.

(중략)

이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실험에 참가한 모든 쥐들은 미로를 돌아다니면서 이 미로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즉 어디가 막혀 있고 어디가 뚫려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미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이미 다 학습했다. 즉, 쥐들은 단순히 몇 번째 골목에서 좌회전을 하고 그 다음 골목에서는 우회전을 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미로 전체에 대한 지도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게 학습한 내용은 쥐의 머릿속에만 있을 뿐 구체적인 행동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 먹이는 쥐의 머릿 속에 담긴, 미로 전체에 대한 지도를 드러내는 열쇠가 되었다.

잠재 학습 실험을 통해서 톨먼은 무엇을 학습하는 것과 그 학습한 것을 드러내는 것은 별개의 과정이며, 쥐든 사람이든 어떤 상황에서 자기가 배운 것을 드러내고 어떤 상황에서는 숨길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중략)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철밥통을 끼고 앉아서 복지부동하는 인간들로 치부되곤 한다. 도무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공무원들과 일을 해본 경험에 따르면, 그들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일을 한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 일들 대부분이 서류를 위한 서류에 해당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공무원의 입장에서는 일을 잘해서 보상을 얻는 것보다는 실수로 인해 책임질 일이 발생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크게 의식된다. 원래 그 분야의 일들이 집안 살림과 비슷해서 (나라살림 아니던가) 잘 돌아갈 때는 눈에 띄지도 않고 잘하는 티도 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금방 눈에 띄고 온갖 비난과 책임 추궁이 닥치게 되어 있다. 공무원 세계에서 언제나 근거 서류를 따지고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책임 추궁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으면 피하려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적절한 방아쇠를 당겨주기만 하면 급작스럽게 좋은 결과를 보여준다. 즉, 그들이 행동하지 않는 것은 주변 여건이 그 행동을 유발하는 방아쇠를 제대로 당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이나 쥐나 마찬가지이다.

톨먼의 발견은 학습심리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구체적인 행동의 학습에 집중해왔던 심리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서 마음속에 담아가는 학습을 연구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미국 심리학계에서 행동이 아니라 생각의 구조나 내용을 연구하는 인지심리학 cognitive psychology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쥐조차도 배운 것을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겉으로 드러내는 행동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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